20260127. 상(像), 상(想), 상(賞) - 있음과 없음을 어루만지는 생멸연기(生滅緣起)의 서사

2026. 1. 29. 11:04News & Column

20251031-김영란전 평문-유대수.pdf
0.11MB

 

[20260127 - 0208. 김영란전. 복합문화지구 누에]

(), (), () - 있음과 없음을 어루만지는 생멸연기(生滅緣起)의 서사

유대수 / 화가, ()문화연구창 대표

 

지금의 삶은 언제나 이후의 삶을 위한 원형적 존재가 된다. 원형은, 예비된 순환을 위해 채워진 어떤 것들을 스스로가 기꺼이 지워냄으로써 역설적으로 재생과 환원, 자기 치유의 맥박을 지속시킨다.” 이 말은, 꽤 오래전 김영란의 회화 세계에 대해 필자의 소감을 기록한 것 중의 일부다그때는 전시의 일단을 흘깃 감상한 시평에 불과했으나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김영란의 또 다른 작품들-앞서간 삶에 대한 위로와 헌사(獻詞)로 가득 찬 기념비(Monument) 앞에서 그 연연한 의식의 연결고리와 여전히 유효한 재생, 환원, 자기 치유라는 명제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한편 시간-엔트로피(Entropy)의 방향에 대해서도 자동 연상하게 만든다.

 

오늘의 삶은 불과 하루 뒤면 과거의 기억으로 쌓이고, 생생하게 빛나던 색채는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그리하여 끝내는 사라지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렇게 이전의 삶-들은 말끔하게 지워진 낙서처럼 없음의 영역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종종 오늘의 삶은 다시 내일을 위한 자기 정립의 지표가 되기 위해 참조 가능한 원형으로 작동하며 여전히 있음의 영역에서 멀쩡하게 숨 쉬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김영란은 트로피(trophy)’ 또는 레시피(recipe)’라는 기표(記標, signifiant)를 차용하여 자신만의 기의(記意, signifié)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재배열한다.

 

김영란식 조형-한지 캐스팅(Casting)아버지가 남기신 여러 뭉치의 한지로부터 시작된다. 부모님이 아끼던 물건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고, “그들의 손때가 묻어, 사연이 있어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몇 년째 끼고 있던 그것들과 멋진 이별을 하고 싶었던 김영란은 원래의 물성을 하얀 한지에 봉인하고, 그 기억과 추억만 채집하기로한다. 남겨진 유품-운동 기구, 약병, 수석, 가재도구, 장난감 등 작가의 시야에 걸린 모든 물건에 김영란은 한 번 더 자신의 손때를 입힌다. 그야말로 원시적으로, 얇은 한지를 한 장 한 장 붙여나가고, 거즈를 대어주고, 물 바르고 풀 바르고, 물수건으로 꼭꼭 눌러가며아주 미세한 형상의 결과 기억의 틈마저도 행여 놓칠세라 정성을 다해 앞서간 생의 의미를 새겨 복제한 후 상찬(賞讚)의 노래로 삼고자 했다. 심지어 나의 손길이 닿았던 살림살이까지마저도 그러하다. 그렇게 부모님의 삶과 나의 삶이 교차하고 덧대어지는 트로피들이 완성되어 갔다.”

 

여기서 손때가 묻었다는 말은 김영란의 최근 조형 작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손때는 작가 자신과 부모님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축적한 일상의 노동과 사유, 향수와 전망을 간단(間斷)없이 뒤섞어 쌓은, 겹친, 다독여 융합해 낸 전체로서의 세계를 지시하는 개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행위와 관계, 소멸과 생성이 교차하고 연립-연속하는 그러한 세계 말이다. 또 손때는 어제와 오늘, 있음과 없음의 경계로서 흔적(trace)이자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없음과 있음을 포개어 무한히 연결하고 관계짓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예술적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무수한 손때의 반복과 겹침을 통해, 존재의 소용을 다 하고 폐기 처분될 운명인 부모님의 유품과 나의 손길이 닿았던 살림살이는 이전 삶의 원형을 버린 채 김영란이 구축하고자 하는, 예비하고자 하는 또 다른 삶을 간추려 반영하는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의 이미지로 우리 눈앞에 자리 잡는다.

 

없음을 인지한 그 순간 굳이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김영란의 이러한 조형적 태도와 끈질긴 형상 떠내기에의 의지는 텅 비어 있다고 느꼈던 우리 모두의 심연(深淵)손때가 묻어다듬어지고 어루만져진 엄연한 실재(reality)를 들이밀어 감각과 사유를 일깨운다. 이런 식의 재현된 실재는 트로피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원래의 자리를 떠나 옮겨진 것,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결과적으로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있-었음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물리적 시각화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캐스팅되어 모아진 각각의 사물이 실제 크기와 같다는 점에서, 저 무수한 삶의 편린(片鱗)들이 언젠가 있-었음과 지금 여기 있음을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인식하도록 이끄는 추체험의 장치가 되어 준다. 그렇게 김영란의 트로피는 미색의 부드러움으로 담담하지만, 꽤 험난했던 삶의 서사를 겹겹이 두르고 있다. 그리하여 없음의 자리에 있음의 표식을 세워 잠들었던 기억을 현재의 호흡으로 불러내며 부재(不在, absence)의 현전(現前, presence)을 확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부모의 흔적에 나의 손짓을 덧대는 일련의 행위를 통해 현존재로 드러난-드러났다고 믿는 트로피는 원형-1차 사실이자 이전의 기억을 벗어난 지금 여기의 외형-2차 사실이자 새로운 기억으로 생성된 일종의 독립된 개체이자 새로운 사건(event)이 된다. 그리하여 이전과는 다른 삶,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며 선형(線型, linear)의 시간-선을 벗어나지 않고도 별다른 문제 없이 계속 흘러갈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트로피는 옮겨진 사실로부터 재전유(再專有, re-signification)되어 자기 스스로 힘으로 다시 부재를 예비하는 새로운 원형-성을 확보한다. 이를테면 트로피가 현재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트로피는 즉시 어제의 기념비가 되어 점차 잊히게 될, 텅 빈(실제로 한지 캐스팅의 내부는 텅 비어 있다!) 부재의 영역으로 사라질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변화가 없으면 시간도 없다라는 고대 철학자의 통찰은 오늘에 와서 김영란이 쌓아 올린 환원의 모뉴먼트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고 우리의 온몸과 정신을 통각(統覺, apperception)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트로피는 과연 무엇이며 무엇으로 남겨질 것인가에 대하여 숙고해보자. 어떤 식으로 트로피의 의미가 해체될 것인지, 어떻게 실물로서의 트로피가 사라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기실 김영란의 트로피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는 익숙한 사물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오직 작가의 시선에 따라 선별되고 캐스팅되어 얼기설기 붙어 있을 뿐 명백한 하나의 주체로서 트로피라고 할 수 없다. 개별의 기능을 상실한 물건들이 서로 기대어 의지하고 관계하며 단지 원형으로부터 떠내어진 2차 사실로서만, 거대한 외곽선의 구조로서만 트로피인 척하고 있을 뿐 원래부터 트로피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상찬이자 헌사이고 위로이자 기념비이며 자기 치유의 선험적 기제로 기획된 김영란의 트로피는 역설적으로, 언제든지 낱개로 분리되어 각자의 모습과 쓰임에 어울리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돌아갈 본래의 자리는 어디인가. ‘원래 있-던 트로피는 어디로 갔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김영란의 트로피를 통해 원래 있-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식의 문제의식과 미학적 풀이의 장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김영란은 언젠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믿는 존재-행위들을 다시 그러모아 여기 있노라고 제시한다. 하지만 별다른 설명 없이도 우리는 곧바로 눈치챌 수 있다. 그렇게 제시된 형상-들은 이전에 있-었던 사실로부터 옮겨진, 복제된, 이전과는 다른 사실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김영란이 제시한 형상-트로피는 이전의 사실은 지금 없다-는 새로운 사실을 더 깊이 깨우치게 하는 역설의 증거가 되어 우리를 미망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런 순환의 전 과정을 내심 헤아리며 우리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와 함께 무한 반복하는-것처럼 느끼는 삶의 굴레는 과연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되는 것일까식의 자문자답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지점, 우리의 사유를 이끌어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김영란의 트로피가 원하는 바, 기획의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 대개의 시각 표현물-들의 바라는 바가 그러하듯, 그렇게 연쇄하는 질문과 대답으로부터 인식의 교차와 교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거기까지 나아갈 때라야 김영란의 트로피는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터-현실 구조에 거리낌 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으며, 그 형상의 취지와 내밀하고도 온전한 가치를 제대로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김영란의 트로피는 개인사로부터 시공간의 서사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유무생멸(有無生滅)의 자연 순환을 변용(變容)해 내고자 하는, 위로와 위안의 제의(祭衣)이자 소지(燒紙)의 예술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덧대고 이어 붙여 새로움을 발현하고자 하는 행위와 불태워 소멸시키는 없음의 자리에서 기원(祈願)하고 축원(祝願)하고자 하는 원리의 역행이 마주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 있음과 없음은 별개가 아니며 서로 공존하거나 돌아서고, 부딪히거나 변화하면서 세계의 본질과 현상을 운위하노라고 역설한다. 지금 여기 우리 눈 앞에 펼쳐진 트로피-들의 풍경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면한 조형물-모뉴먼트의 체적(體積)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춰진 서사의 질량에 관하여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 202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