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709. 2회전 - 젊은 작가의 미학탐구

2025. 3. 1. 12:47News & Column

 

젊은 작가의 미학 탐구 - 유대수론 - ‘새로움희망으로

윤태건/미술평론

1997. 작가들, 여름호

 

(전략) 아무리 예술이 길고 인생은 짧다지만 예술보다는 삶이 먼저다. 유대수의 작업을 얘기하기 전에 리허설이 다소 길었던 것은 역사적 지평 위에 우리가, 그리고 유대수의 작업이 어느 선상에 위치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은 단순히 민중미술이나 개념미술과 같은 일반화된 범주에 넣기가 곤란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젊은 세대들의 작업과도 거리가 있다.

그의 작업은 자칫하면 앤디 워홀이나 강익중 작업의 답습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으며 반대 축에서는 이철수 류의 선() 사상이 기저에 깔려 있는 목판화의 아류격으로 치부해 버릴 소지도 다분히 있다. 어쩌면 각각의 이미지들이 던지는 수사학의 이질적인 모습들은 불편한 제휴를 맺고 있는지도 모르며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도상(Icon)과 지표(Index), 상징(Symbol)이 하나의 통일체를 갖기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건 유대수의 작업에서는 얄팍한 아이디어가 추구되지는 않는다. 철학과 사상이, 그리고 이것들을 발생시킨 삶과 현실이 옳게 반영되는 작업보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경향이 짙어진 우리 미술계의 풍토에서 유대수의 작업은 거창하지는 않지만 힘든 현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솔함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런 따뜻함은 현실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승리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을 갖게 해준다. 그는 결코 칸트(I. Kant)가 경계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은 뒤틀어져 있거나 꼬여 있지 않다.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되 언제나 희망적이다.

 

새로움 희망으로 언제나처럼 잔뜩 웅크리다 허리를 곧게 편다.”

 

그의 작업 노트에 적힌 시구처럼 그의 작업은 많은 이들이 놓아버린 희망을 안고 있다. 그의 희망 찾기게임은 작업에서, 삶으로 일치되고 있다. 유대수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보여준 길 찾기-희망을 위하여는 전주의 효자동이 개발지구화되고 삶의 터전인 이 문명의 지표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대체되면서 나타나는 문제에 대하여 희망을 갖자고 얘기하고 있다. 위압적으로 들어선 아파트촌이 모노톤으로 배경에 깔리면서 그 앞에 자라나는 새싹은 시각적으로 포인트를 주면서 건조하고 차가운 화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는 위압적인 콘크리트 더미와 자그마한 새싹을 대비시키면서 거창한 구호나 생경한 목소리로 도시화, 산업화, 자본주의화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작지만 높고 멀리 울리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수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솟대, 소나무, 새싹 등이 가지는 도상학적 이미지는 그 자신이 설정했다고 언급하는 일정하게 약화된 기호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기표와 기의가 분리되지 않은 울림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아직까지 소비되지 않고 관조되는 것 같다. 미술계 내에 본말이 전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관조상태에서의 수용은 아직 그의 작품이 현재적 의미에서의 아우라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유대수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한 경향은 칼맛이 살아나는 볼록판(우드락이라는 재료를 주로 사용하는데 목판화의 효과를 낼 수 있으며 목판보다 연한 재질이다.) 작업이다. 유대수의 볼록판 작업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표현적이고 직접적인 모습에서 현재는 좀 더 전적이면서도 생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앞에서 어느 정도 언급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경향은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작업이다. 이것은 대중매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복사한 후 병렬식으로 배치하거나 복사된 이미지 위에 드로잉을 하는 작업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유대수 자신도 언급하듯이 앤디 워홀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앤디 워홀이 원본(originality) 부정, 작가의 손수 작업이나 기량에 대한 무관심(작가는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제작은 조수나 공장에서 진행하는 방식), 반복을 통한 작품의 유일성에 대한 부정을 통해 꾀한 것은 무자비한 상업주의와 출세지향주의였다. 그는 고급미술과 대중미술 간의 경계를 파괴하고 더 나아가 미술품을 상업 시스템에 종속되는 일개의 상품으로 파악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앤디 워홀의 작업에서 아우라는 가차 없이 파괴되었고 대신에 스타 시스템에서 부활한 신화적인 스타 작가의 아우라를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유대수는 앤디 워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상업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중략) 유대수의 멀티플 작품에서는 끊임없이 흔들리고는 있지만 온전하게 코드화되지는 않고 있다. 우선 그는 대상보다는 주체에 우선을 두고 있다. 흔들리고는 있지만 아직 해체되고 코드화된 대상에 의해 지배당하는 주체는 아니다. 그는 패널 작업에서 복제된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장식성이 강하면서도 한국적인 색감과 패턴을 대비시키면서 끊임없이 통일체를 추구하면서도 앤디 워홀이나 강익중, 김정헌과는 다르게 그 마침표가 텍스트 밖이 아닌 안에 있다. 이것은 작가가 살아가는 삶이, 현실이, 이상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포스트모던 문화 형식과 미술에 대한 동경을 가졌을 때 영향을 받은 앤디 워홀의 그림자에 의해 받는 강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를 여전히 희망을 찾는 작가이게끔 해주고 있다.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복제하는 행위에서도 어설프게 대중문화의 폐해를 비판해 보겠다는 호기도 부리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결코 지배당하지 않으면서도 경직된 언어로 비판하거나 거부하지도 않는다. 필자는 여기서 유대수의 패널 작업이 아직은 모색기, 혼란기임을 느끼면서도 애정 어린 믿음을 읽는다. 그것은 리오타르가 선동한 총체성에 대한 투쟁의 순기능과 역기능 중 순기능만을 걸러서 그의 작업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에서이다. 사물이 변화, 발전한다는 것은 더 복잡해지고 더 넓어진 사회현상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거대 서사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다양한 영역으로 인도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권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같은 순기능이 역사와 민중이라는 거대 서사에서 적절히 자리매김하고 통일체를 이뤄 그의 작품 세계에서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아직은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불편한 제휴를 맺고는 있다. 속된 말로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앤디 워홀에 대한 초기의 동경, 암울했던 80년대 초반을 딴따라로 보내면서 내적 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과 91년 한판 싸움을 거치고, 지역미술운동을 일궈내면서 보여주었던 그의 삶에 대한 따뜻한 희망이 부딪히면서 아직은 동일한 계열체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미술은 나의 삶의 실천적 대안이라는 작가의 언급처럼 그의 작업에서 통일체를 형성하는 것은 경직된 구호나 팝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인 문화 양식 중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을 강압적으로 눌러버림으로써 완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대수의 작품 세계와 그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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