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830. 지역미술을 바라보는 눈 - 정육면체 속의 미술전
19980830. 지역미술을 바라보는 눈 - 정육면체 속의 미술전
1998년 전북민족미술인협의회가 마련한 [정육면체속의 미술]전 1차 준비토론회 발제용 원고 - 19980830 탤리카페
지역미술을 바라보는 눈
1.
한국사회에서 지역의 개념은 협소하다. 그것은 종종 향토성, 토속성과 일치하기도 하고 중심에 대비된 변방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 '지역'의 경제, 문화, 정보, 매체 전반의 후진성과 비생산적 폐쇄성을 무의식중에 당연시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지방자치는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지자체의 존립근거가 자본사회의 동력구조에 충실한 일반적? 경제논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문화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우리들로서는 그리 달가울 것도 없다.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담보한다는 것의 의미의 해석은 각 주체의 입장에 따라 그 각도가 빗나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은 초유의 경제난국의 시기에는 더더욱 문화예술의-그것도 지역내의- 안위를 살필 겨를이 없을 것임은 뻔하다. 억울해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최대한의 적극성과 활발한 행위-창작표현이든, 언술이든지 간에-를 포함한 대안의 마련이다. 어차피 우리의 전략은 일정하다. 결국은 다양한 전술의 십자포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언젠가부터 '지역'은 수평적 등가의 개념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이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이어도 좋고 글로컬(Glocal)이어도 좋다. 문제는 어떤 식의 상황이 기획되고 연출되는가에 따라 '지역'은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의 지점. 여전히, 우리는 한 지점에 있어 왔고 계속해서 있을 뿐이다.
지역미술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메뉴의 한가지는 바로 학맥과 인맥이다. 어느 미술관, 어느 미술인 모임에 가도 우리는 선배, 후배, 친구와 마주친다. 알고 지낸다는 사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구석진 동네잔치 식의 협소함을 적절히 안배한 좋지 않은 의도가 실릴 때 우리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말이다. 학맥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검열 당해버린 소극적인 미술의 디스플레이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눈치보지 않는 과감한 발상이 필요하다.
2.
일단 크게 보자면 이번 전시는 지난 '97년에 있었던 <인간과 환경전>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처음 시도되는 유일한? 전시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각론적으로 살펴보아 여타의 대규모 집단화된 전시와의 차별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있다. 그 하나는 정육면체라는 조건이다. 물론 정육면체라는 형상이 주는 특별한 의미는 없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것은 막힌 공간일 수도 있고 열린 공간일 수도 있다.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의지를 방해하는 한계점일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새로운 조형형태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이 전시를 위한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결국 정육면체가 아닌 다른 무엇이 제공되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며 그 장치의 요구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각 참여작가의 몫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조건은 전시기획 및 그 기획의 진행에 있다. 이것 역시 하나의 장치 또는 실험일 수 있는데, 기획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전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 중 하나는 '기획력'의 고양이다. 적어도 우리가 '지역미술의 현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미술'의 의미는 아주 단단한 각질에 쌓인 협애한 고무공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살필 수 있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 중의 하나는 그 영역을 조금씩 넓혀 가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번도 제대로 된 미술행정가나 이론가 또는 미술 기획자, 큐레이터, 심지어는 '미술관료'조차도 가져보지 못했다-물론 이 점은 여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사회 일반의 현상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작가(?)는 아주 많지 않은가! 우리의 현재적 상태를 검진하고 처방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일들이 모두 작가의 발등으로만 떨어진다면 분명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시작점은 우리에게 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잡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소박하게도 적절한 미학적, 실천적 대안의 생산은 작가들 자신의 몫일 뿐이다.
역시 마찬가지 의미에서 기획전시의 진행방향을 이해했으면 싶다. 비판적, 생산적 토론문화의 부실함이 낳은 기형적 미술관(觀)은 언제나 자폐적이고 일방적이며, 자유로운 변화를 거부한다. 알량한 아집으로 뭉친 잘난? 미술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적어도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청산의 대상인지, 미술은 어디까지 유효하며 우리가 벌이는 행위는 어디서 어디까지 미술인지에 대해,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각자의 삶의 질문들에 대해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에 걸친 세미나를 예정한 것은 그러한 기회를 삼자는 의도가 깊이 박혀 있다. 몇몇 그룹들에서 이미 시도된 바가 없지 않지만, 이러한 의도의 핵심은 '자율적 미술문화'와 '비고착의 수평적 교차'에 있다. 당연히 그것은 단번에, 하나의 전시로써 해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 쉽게 말해 자주 판을 벌림으로써 습관화하자는 것이다.
이외에도 조건들은 많다. 우수작 선발이라든지, 젊은 미술인들의 교차 교배라든지, 출품료의 문제, 전시 주제에 관련한 선명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는 식의 것들 말이다. 이것들 모두가 각론화하여 토론해 볼만한 가치의 것들임에 분명하다. 과정을 통한 연마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전시 자체의 성패는 둘째치더라도 자신의 미술적 고민들과 이 지역에서 행해지는 미술의 하나의 단계를 위한 심신들이 만나질 수 있다는 의미만으로도 우리는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미술가 자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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